『내 이름은』(감독 정지영)은 제주 4.3 학살을 다룬 영화이다. 구성은 두 가지로 전개된다. 한편에서, 어머니 영옥이 상실한 기억 속에서 목격하는 학살과, 다른 한편에서, 그 같은 이름의 아들 영옥이 다니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그것이다. 영화 말미에, 마침내 학살의 기억을 더듬어 낸 어머니 영옥이 자신의 이름을 찾아 바꾸면서, 영화는, 제목이 『내 이름은』이 되었다.
어머니 영옥이 기억을 더듬어 찾는 단계에서 두 가지 부수적인 소재가 개재한다. 하나는 학폭의 발생이다. 어머니 영옥이 단계적으로 기억을 되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주제가 되는 학살의 장면이 부수적 소재로서의 학폭 현장과 병렬적으로 전개된다. 다른 하나는 경찰과 의사의 등장이다. 학폭을 진압하는 경찰이 등장하고, 또 영옥의 상실된 기억을 되살리도록 도움을 주는 조언자 및 약물 치료자로서 의사도 등장한다. 학폭의 발생이라는 한 가지, 그리고 진압 경찰 및 치료자 의사의 등장이라는 한 가지, 이 두 가지 부수적 소재는 4.3 학살의 본질을 다소간 왜곡한다는 점에서 반성이 필요하다.
먼저 4.3 학살과 상관할 성격의 폭력으로 학폭을 병렬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정부조직에 의해 자행된 4.3 학살의 폭력은 학폭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인 간에 벌어지는 폭력과 군⸱경 등 정부조직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은 같은 선상에 놓고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자는 그 사회적 의미가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이다.
김민웅(촛불행동 상임대표)은, “제2차 대전 및 아시아-태평양 전쟁 종전 후 최초의 세계적 학살의 장(킬링 필드)이 된 제주도”를 다룬 “거장 정지영 감독의 이 영화는 단연 ‘2026년 올해의 영화’”, “이 영화의 시나리오 단계로부터 완성, 편집에 이르기까지 나(깁민웅)는 자문 역할을 했다”, “영화의 내용과 구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무척 자랑스럽다”, “이 영화 안에 숨겨진 코드들은 참으로 많다. 학폭과 제주 4.3이 연결되면서 펼쳐지는 구성에는 치밀한 장치들이 담겨 있다. 자칫 놓칠 수 있는 장면의 의미 가운데 하나로 학생들이 패싸움하는 현장” 등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 2개 폭력을 본질상 같은 것으로 보게 되면,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같은 성격의 폭력은 동일한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쉬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3 학살은 학폭과는 다른 차원의 반성과 대책이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2개 폭력은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그 증거가 영화 자체에서 묻어나온다. 영화에서 학폭은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4.3 학살은 정부의 군인, 경찰 등이 자행한 것이므로,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폭과 4.3 학살, 2개 폭력의 병렬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 것으로, 군⸱경 등 정부조직의 폭력에 의해 양민이 그만큼 희생당하고도, 사건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문제는, 정부조직이 행사하는 폭력에 대해 당연히 저항 담론으로 귀결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경찰이 학폭을 진압하는 주체로 등장하다는 점이다. 정부의 폭력이 한편으로 양민을 학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같은 정부의 조직이 여전히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치안 유지자로서, 그 공정성과 정의성이 여전히 부각되고 있다.
이보다 더 황당한 것은 학폭에 가담한 학생들이 감정적, 비이성적인 행동의 주체로 설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경찰의 개입이 정당화된다. 경보음을 울리며 경찰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관객은 비로소 “이제 안심이다”라는 느낌, 무질서 대신 질서가 제자리를 찾는 듯한 안도감을 갖게 된다.
영화의 이 같은 구성은 양민을 학살한 정부 폭력에 대한 반성을 무디게 하고, 언제든 다시 폭력과 압제의 주체로 변할 수 있는 정부에 대한 저항 의식을 무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이 영화뿐 아니라, 우리네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부 권력에 대한 맹목적, 봉건적인 심리적 종속성을 반증한다.
이 영화에서 학생(군중)이 집단폭력의 주체로 조명되는 것은 경찰의 치안 유지를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것은 군중을 집단지성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경우와 정반대가 된다. 군중이 집단폭력이 아니라 집단지성의 주체가 될 수 있다면, 경찰이 와서 치안을 유지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국가 조직이 폭력을 행사할 때, 그에 저항하는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중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한편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지성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에서든, 이들이 개인이나 집단으로 행사하는 폭력 혹은 지성은 정부조직이 행사하는 폭력 혹은 지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기원전 5세기 『역사』(『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지은 그리스인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조직적 군대와 무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에 대해 경계했다. 군대조직의 폭력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사적 폭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양자는 성격이 다르므로, 그 대처 방법 또한 같지 않다.
흔히 일컫는 ‘투키디데스 함정(trap)’이란 양국의 군사력이 비슷할 때 상호 평화가 유지된다는 ‘현실주의’로 이해된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그 같은 국제질서를 피력하기 위해서 방대한 『역사』의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군대조직 및 무력의 증강 자체가 인간 사회 자체를 피폐하게 하는 것이라 보고, 조직 폭력을 경계했다.
투키디데스는 자연의 인간성과 사회조직을 구분했다. 인간성은 불변이나, 사회조직은 인간의 힘으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개인이나 집단 간에 벌어지는 폭력은 불변의 인간성에 기인하므로 원천적으로 막을 도리가 없고, 폭력이 발생하면 그때그때 형편에 맞게 대처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군대나 군비증강은 자연성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가 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약 30년간 벌어진 전쟁의 원인이 바로 양국이 각각 증강해온 군사력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조직적 군대와 무력에서 파생하는 전쟁의 피해는 치명적이다. 전쟁은 사적 폭력이 야기하는 피해에 비교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전쟁은 폭력의 교사인 반면, 평화는 배려와 우애 등 긍정적 인간성을 조장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한다. 인간은 어차피 두 가지 상반된 자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 어느 것을 더 조장하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사회적 환경에 달려 있다고 투키디데스는 보았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전쟁은 승자와 패자 양쪽에 아무런 득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일시적 승리와 패배는 있을지언정, 확률에 따라 궁극적으로 반반의 승패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항상적 승리와 항상적 패배는 있을 수 없고, 그 일시적 승패에 개입하는 것은 인간의 소원과 노력이 닿지 않는 ‘우연(티케)’이다. 반반의 확률밖에 담보하지 않는 전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득이다.
영화 『내 이름은』은 4.3의 정부 폭력과 학폭을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모든 폭력을 동일하게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폭력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필살기로 싸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받아 자신의 생활근거지와 가족의 안전을 위협당할 때, 또 일상에서 부당하게 상대로부터 폭력 등 위협을 받는 경우에 그러하다. 이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지혜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용기, 그리고 적을 물리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용기와 지혜는 중용의 미덕과 다른 맥락에 있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 아테네인이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응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던 마라톤 전투(육전), 살라미스 해전을 높게 평가했다. 이때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것은 시민병이었다. 시민병이란 말 그대로 정부의 조직된 군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시민은 생업(농업, 상공업 등)을 따로 영위하며, 각기 무장하나, 부득이할 때, 자체 무장하고, 출정했다. 이곳은 정부의 무력조직과 시민이 2원화된 사회가 아니었고, 오히려 시민 자신이 나라를 지키는 병사였다.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에서도 질서의 유지는 경찰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시민이 스스로 해야 한다. 이 경우 정부조직인 경찰은 시민 위에 군림할 수가 없고, 보충적으로만 작용해야 한다. 경찰이 폭력 진압에 우선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면, 개인이나 집단 간 사적 폭력이 개재할 때 누구를 벌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더 잘못한 쪽이 있고, 덜 잘못한 쪽, 혹은 부당한 공격에 저항하여 정당방위를 행사한 쪽이 있을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폭행이 발생한 경우, 형편을 가리지 않고 쌍방을 다 벌한다. 치안 유지의 주체가 시민이 아니고 정부 권력이라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 권력 위에 시민의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민주사회에서는 먼저 원인을 제공한 일방만 처벌한다. 후자의 경우, 시민은 집단지성과 정당방위의 주체로서 정부조직의 폭력에 저항하고 맞서야 하는 주체로서의 근거를 다지게 된다.
영화 『내 이름은』에는, 은연중에 정부조직으로서의 경찰을 정당화하는 장치 이외에, 또 하나의 숨은 장치가 깔려 있다. 어머니 영옥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개입하는 의사의 역할이다. 영화에 나오는 여의사의 차가우리만치 냉정한 시선은 이성적, 과학적 치료자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듯하다.
여의사는 영옥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눈을 감으라고 하고, 또 좌우로 눈을 돌리도록 한다. 그런데 상실한 영옥의 기억은 의사의 매개 없이도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약물이나 눈돌림이 없어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의 기억은 혼자서 들로 차를 몰고 나갔을 때 돌아왔다.
의사의 매개는,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 단언하기는 어렵겠으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힘은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내재한 것으로서, 생체가 갖는 자연 치유력이다. 이는 마치 사회질서가 경찰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경찰이 보충적 역할에 머물 듯이, 의사의 도움도 보충적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4.3 학살과 학폭의 유비는 경찰을 치안 유지와 정의 실현의 대리자로서 받아들이는 관성적 순치의 효과를 초래하고, 시민의 항상적 저항과 정부 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경계를 완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4.3 학살의 교훈은 검⸱경, 군대 등, 정부조직에 의해, 합법의 가면하에, 혹은 대놓고 불법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반성과 저항의 필요성이다.
대통령 이재명이 『내 이름은』을 관람한 다음, “제주 4.3은 정말 잔혹한 사건이었던 같다”,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나. 그 원인은 무엇일까”, “대량 학살이나 잔혹한 행위의 배경에는 정치 권력이 있다. 권력의 이름으로 비호하거나 조장할 때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 “제(이재명)가 생각한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영원히 책임을 묻는 것”, “(이재명 자신이) 얼마 전 (국가폭력 관련자들의) 포상과 훈장을 취소시켰다”, “사람들이 손잡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이 영화가 길을 열어줄 것”등 소회를 전했다.
여기에 이재명이 놓친 것이 서너 가지가 있다. 첫째, 4.3 제주 학살의 원인을 인간성에서 찾는 것이 그러하다. 이재명은 잔악할 수 있는 인간성의 본질에다가 정부의 조직 폭력이 더해졌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정부의 군⸱경과 함께 미군의 무력까지가 그 잔학성을 더하는 데 합세했다. 인간성만 탓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정부의 조직 폭력은 사회구성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군대와 군비의 증강 및 전쟁의 사회환경이 인간성 가운데 부정적인 면을 더욱 조장, 가중시킨다.
둘째, 이재명은 4.3 학살을 권력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권력의 힘으로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음에도 왜 막지 않느냐면, 적당히 이익을 취하고 은폐하고 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그러하다. 이런 식의 해답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밖에 담지 못한다. 권력이 학살을 막지 않고, 오히려 적극 나서서 학살을 자행할 때 피학살자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학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이재명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자손만대까지 책임을 묻고, 공소시효와 소멸시효도 폐지해야 한다”, “독일 전범은 처벌 시효가 없다. 나치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지금도 잡아서 처벌하고 있다”, “아마 독일 사회에서 다시는 집단 학살이나 반인권적 국가폭력이 재발하기 쉽지 않을 것”, (대통령 자신이) 얼마 전 (국가폭력 관련자들의) 포상과 훈장을 취소시켰다”등의 발언이 그러하다.
정부 역할에 대한 이재명의 이 같은 발언은 현실과 괴리된 점이 희망고문에 가깝다. “자손만대까지 책임을 묻고, 공소시효와 소멸시효도 폐지”한 것도 아니고, 한국이 독일 같은 것도 아니다. 이재명이 정부 폭력 관련자들의 포상과 훈장을 취소한 것은 1회성 뒷북이며, 사후약방문일 뿐, 이후의 재발에 대한 방지, 예방을 원천적으로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재명의 허황한 희망고문은, 한편으로 자신의 선의를 홍보하는 효과를 낳기는 하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시민 민중에게서는, 정부에 의지하고 정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저항력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재명은 “사람들이 손잡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이 영화가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희망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 이름은』은 정부조직의 폭력 문제를 다시 정부조직에 의한 치안유지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역사적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원점으로 회귀하도록 하는 독소를 깔고 있다.
『내 이름은』의 내용과 구성에 일정환 역할을 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김민웅은, “이 영화 안에 숨겨진 코드들, 치밀한 장치들이 담겨 있다”, “자칫 놓칠 수 있는 장면의 의미 가운데 하나로 학생들이 패싸움하는 현장”이라고 했으나, 그 숨은 치밀한 장치로서의 학폭 패싸움은, 김민웅이 뜻하는 바와는 반대로 읽힐 필요가 있다.
4.3의 정부조직 폭력은 조직과 무관하게 벌어진 학폭 패싸움과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전자는 사회구성적 산물이나, 후자는 불변의 인간성에 내재한 불가피한 폭력성에 근거한 것으로서, 검⸱경 등 정부의 조직적 무력과 무장이 개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