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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칼럼】 침묵의 저울, 누구를 위한 공정인가

김준권 | 기사입력 2026/09/01 [22:00]

【김준권 칼럼】 침묵의 저울, 누구를 위한 공정인가

김준권 | 입력 : 2026/09/01 [22:00]

선의(善意)로 포장된 제도의 역설, 그 아름답고도 서늘한 출발

압축성장과 성실의 문법, 한국 사회의 독특한 지층 

평범한 다수의 소외, 그리고 역차별의 그림자 

억지스러운 포용이 무너뜨린 신뢰의 탑

진정한 연대,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향하여

▲ Ai 제작이미지  ©



선의(善意)로 포장된 제도의 역설, 그 아름답고도 서늘한 출발

 고요한 새벽의 서재에 앉아 문득 창밖을 내다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늘 수많은 선의(善意)와 당위(當爲)로 덧칠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아픔을 보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별받는 이들의 손을 기꺼이 잡겠다는 다짐.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찬란하고도 숭고한 품성 중 하나일 것이다.

 

 2010년 이후 태평양 건너 미국 사회를 거칠게 뒤흔들고, 이제는 전 세계의 지성계와 노동시장을 거침없이 관통하고 있는 세 글자, 다양성(Diversity)과 공정성(Equity), 그리고 포용성(Inclusion)을 뜻하는 ‘DEI’ 역시 그 출발점만큼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인종과 성별, 성정체성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혀 숨죽이던 이들에게 길을 터주고,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약속. 그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갈구해 온 보편적 정의의 또 다른 이름처럼 보였다.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다지겠다는 이 철학적 선언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시대의 절대 선(善)이자, 진보하는 인류가 당연히 도달해야 할 목적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고결한 이념이 지상(地上)에 내려앉아 현실의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순간, 제도의 톱니바퀴는 어김없이 서걱거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자발적 연대와 선의가 '법령'과 '강제적 제재'라는 뻣뻣한 옷을 입는 순간, 그 따스했던 온기는 차가운 관료제의 수치와 할당량으로 변 환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다인종 실험장이 최근 겪고 있는 뼈아픈 균열과 역풍은 비단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다. 오히려 이 거대한 담론의 파도가 압축적 근대화의 폭발력을 지나온 한국이라는 독특한 토양 위에 밀려들 때, 우리는 고유한 문학적 풍경 속에서 더 깊고 서늘한 균열의 소리를 듣게 된다.

 

압축성장과 성실의 문법, 한국 사회의 독특한 지층

한국 사회의 기저에는 서구의 개인주의적 전통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하는 독특한 결의 억울함과 성실함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척박한 논밭을 갈고, 식지 않는 공장의 기계음을 견디며, 몽당연필을 쥐고 밤을 지새웠다. 그들이 내딛은 피땀 어린 한 걸음 한 걸음은 ‘땀 흘려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소박하지만 엄정한 믿음 위에 세워져 있었다. 자원이 빈약한 이 좁은 반도 국가에서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자신의 끈기와 노력뿐이었고, 그것은 한국식 능력주의(Meritocracy)의 근간이 되었다.

 

산업화의 매연과 민주화의 최루탄이 교차하는 격변의 터널을 지나오며, 우리 국민이 가슴 깊이 품어온 것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념의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가족을 굶기지 않고 온전히 먹여 살리겠다는 처절한 의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내 몫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겠다는 숭고한 책임감이었다. 과정의 투명성과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한국인들의 유별난 집착은, 바로 이러한 피눈물 나는 헌신을 통해 쌓아 올린 '성실함의 신성함'을 지키고자 하는 방어 기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도래한 새로운 규범은 그 성실함의 문법을 송두리째 뒤흔들기 시작했다. 배려와 평등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그물망이 촘촘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 그물의 틈새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이들은 다름 아닌 평범한 다수, 혹은 묵묵히 룰을 지키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제도가 특정 집단을 향해 시혜적 태도를 취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땀 흘리던 무명(無名)의 개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한 지독한 무력감을 경험하게 된다.

 

 평범한 다수의 소외, 그리고 역차별의 그림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명분 아래 결과의 평등을 억지로 꿰맞추려는 시도들은 필연적으로 과정의 불공정을 낳는다. 우리는 종종 묻게 된다. 진정한 공정(Fairness)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래 출발선의 다름을 세심하게 보정하되, 경주가 시작된 이후의 과정과 규칙만큼은 누구에게나 엄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최근 제도의 이름으로 강행되는 논의들은 종종 ‘결과의 기계적 평등’ 혹은 ‘특정 집단에 대한 일방적 배려’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한다.

 

 결과의 균등을 맞추기 위해 과정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도덕적 해이나 절차적 위반조차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포용’이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눈감아주어야 할 때, 성실함은 조롱거리가 된다. 묵묵히 법규를 따르고 하루하루의 의무를 채워온 이들은 깊은 허탈감의 늪에 빠진다. 이들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자문(自問)은 결코 가볍지 않다.

 

"소수가 다수를 소외시키는 게 과연 정의인가. 불법과 게으름이 ‘포용’의 대상이라면, 오늘 하루 성실하게 땀 흘려 살아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너의 다양성은 왜 나의 가치관만은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배제하는가."

 

이 날카롭고도 서글픈 항변은 단순히 제도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정치적 구호를 넘어선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맺힌 깊은 응어리이자, 시대의 모순을 향해 던지는 시적(詩的) 토로에 가깝다. 내가 가진 가치관, 전통적인 미덕, 혹은 보편적인 상식은 순식간에 ‘시대에 뒤떨어진 배제의 언어’로 치부된다. 오직 새로운 규범이 지목한 다양성의 기준만이 유일한 선(善)으로 군림할 때, 우리는 되물을 수밖에 없다. 과연 그 다양성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다양성인가?

 

 억지스러운 포용이 무너뜨린 신뢰의 탑

 우리가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사회적 신뢰의 탑은 거대한 차별이나 외부의 폭력에 의해서 단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불합리’와 ‘역차별의 누적’ 속에서 속절없이, 그러나 치명적으로 금이 간다. 너의 다양성이 존중받아야 하듯, 나의 신념과 삶의 궤적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하고도 소박한 진리가 제도의 칼날 앞에 배제될 때, 공동체는 통합이 아니라 철저한 파편화의 길로 접어든다.

 

 제도는 숫자를 맞추고 통계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강제할 수는 없다. 특정 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할당이나 가점 부여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 희생이 자발적 양보가 아닌 제도의 강압에 의한 것일 때, 사람들 사이에는 연대 의식 대신 날 선 경계심과 분노가 싹트게 된다. 서로를 향한 존중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이 속한 집단의 파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처절한 진영 논리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 인간의 슬픔과 모순을 집요하게 그리는 이유는 바로 제도가 감히 담아내지 못하는 미세한 마음의 결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 짙은 갈등과 피로감은 단순한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보편적 상식’의 회복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다. 평범함이 죄가 되고, 성실함이 미련함으로 둔갑하는 사회에서는 그 어떤 위대한 철학도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진정한 연대,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향하여

 우리는 서로 다른 성별, 다른 세대, 다른 생각과 지향을 가지고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다름은 분명 축복이며, 획일성은 경계해야 할 독이다. 그러나 진정한 포용이란 모든 것을 억지로 하나의 틀에 구겨 넣거나, 법률의 강제력으로 서로의 입을 틀어막는 폭력적인 방식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결이 다른 타인을 온전한 인격체로 바라볼 줄 아는 성숙한 인내심,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되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본 규범과 성실함의 가치만큼은 결코 훼손하지 않는 치열한 균형 감각에서 비롯된다.

 

 법과 제재는 명백하고 부당한 차별을 막는 최후의 방패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연대와 존중을 억지로 끌어내는 마법의 지팡이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억지로 꿰맞춘 다양성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세우고, 서로를 향한 불신과 경계의 장벽을 아득히 높일 뿐이다. 진정한 다양성은 머리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침묵의 저울 앞에 서서 묵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그 찬란한 평등의 끝 모퉁이에서, 혹시 우리는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길가에 속절없이 흘리고 온 것은 아닌가. 타인을 향한 맹목적이지 않은 신뢰,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성실함에 대한 정당한 인정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 말이다.

 

제도의 언어와 앙상한 통계표가 지우려 하는 보통 사람들의 땀방울과 묵묵한 일상을 되돌아볼 때, 비로소 비대해진 구호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잃어버렸던 진짜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의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다양성은 누군가를 찌르는 배타적 권력이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도의 그늘에 선 서로의 상처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차별 없는 부드러운 온기여야만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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