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재난의 잿더미 속에서 인간은 어떤 마음 품을까 【김준권 서평】

[김준권, 서평] 이석현 <재난인문학>이 던지는 역사적 성찰과 학문적 지평

김준권 | 기사입력 2026/09/04 [14:20]

재난의 잿더미 속에서 인간은 어떤 마음 품을까 【김준권 서평】

[김준권, 서평] 이석현 <재난인문학>이 던지는 역사적 성찰과 학문적 지평

김준권 | 입력 : 2026/09/04 [14:20]

 



 책 <재난인문학 - 동아시아의 기억과 미래>
▲책 <재난인문학 - 동아시아의 기억과 미래> ⓒ 역락

 

 

지인 이석현 선생으로부터 그의 노작 <재난인문학>을 전달받은 것은 약 삼 주 전의 일이다. 책을 차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 내내, 손끝에 전해지는 서책의 무게감은 단순히 종이와 인쇄물의 무게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이 주제를 품어 온 한 학자의 집념이자, 끊임없이 사유하고 학술 발표를 이어가며 담장 높이 쌓아 올린 고뇌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학자가 특정 주제를 다년간 깊이 파고들어 마침내 이를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집대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지난한 여정이다.

매료된 청중들, 그 가을 강연장에선...
책의 서문을 넘기며 서가에 놓인 묵은 기억 하나가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지난해 내가 소장으로 있는 빛나사역사연구소에서 이석현 선생을 초청하여 '재난의 역사'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했던 그 가을날의 풍경이다.

 

당시 강연장은 학자들과 시민, 역사에 관심을 둔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찼고, 청중들은 그가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깊게 매료되어 있었다. 자연재해나 참사를 단지 통계 수치나 당대의 국가적 손실로만 파악하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것을 인간 삶의 궤적 안으로 끌어들여 재해석하던 그의 목소리는 강연장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날 청중들의 눈빛 속에 감돌던 감동과 통찰이, 마침내 정갈하고 단단한 필치로 가다듬어져 이 한 권의 아름다운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수년간 하나의 화두에 매달려 학문적 지평을 넓혀온 이석현 선생의 열정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빛나사역사연구소를 이끌어오며 수많은 학술적 성과를 접해왔지만, 이번 <재난인문학>의 출간은 단지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을 넘어, 새로운 학문적 좌표가 설정되는 순간을 목도하는 듯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중국사 관통하는 시련의 궤적
<재난인문학>이 제시하는 핵심 명제는 지극히 명료하고도 선명하다. 그것은 바로 '재난을 단지 물리적·단선적 사태로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재난을 떠올릴 때 거대한 홍수, 참혹한 지진, 가뭄과 기근, 그리고 그로 인해 파괴된 건물과 물질적 피해 액수라는 파편화된 숫자에 주목하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재난이란 단순히 자연의 포효나 물적 손실이라는 단편적 사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구조, 정서, 인간의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종합적인 '인문학적 사건'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접근을 위해 저자는 광대한 중국사의 궤적을 심도 있게 파헤친다. 황하의 범람과 가뭄,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 속에서 반복되었던 대형 재난들은 중국 역사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뼈대와 같다.

저자는 고대 문헌과 사료 속에 흩어져 있던 재난의 기록을 끌어모아, 대륙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연의 거대한 광풍과 대면했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중국사라는 거대한 역사적 시험대 위에서 저자는 재난을 단순한 불운이 아닌, 사회 시스템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인간의 본성을 시험대에 올리는 '사건'으로 전환시킨다.

우리가 역사 속 재난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역사의 면면을 흐르는 인간 존재의 절박함이다. 저자는 중국사 속 수많은 재난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가 단순한 승자와 패자의 기록이 아니라, 비극과 시련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으려 애썼던 무수한 범인(凡人)들의 투쟁기였음을 나지막이 일깨워 준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람들의 마음'
이 책이 정녕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진정한 가치는 재난 그 자체의 참혹함이나 통계적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저자의 시선은 언제나 거대한 파괴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피폐해진 삶, 그리고 그 비극을 견뎌내고 마침내 극복해 내려 안간힘을 쓰던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고 있다.

재난이 덮쳤을 때 인간이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상실감, 멸망의 절망 속에서도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던 숭고한 연대의식, 그리고 무너진 터전을 다시 일구어내려던 불굴의 희망. 이러한 인간 내면의 움직여야 말로 저자가 <재난인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이다. 고대 중국의 백성들이 거대한 홍수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를 다독이던 마음이나, 가뭄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지혜를 모았던 노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간성의 증거이다.

"재난은 단순히 물질을 꺾는 시련에 그치지 않는다. 거대한 비극의 잿더미 속에서 연대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인간의 숭고한 마음, 그것이야말로 재난인문학이 탐구하는 가장 깊은 성찰이자 지혜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재난이란 인간을 파멸시키는 시련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진 가장 따뜻하고 숭고한 마음을 확인하게 하는 거울임을 깨닫게 된다.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 삶을 노래하고, 비극의 슬픔을 공유하며 함께 눈물짓고 일으켜 세우는 동정심과 연대의 마음이야말로 역사라는 도도한 물결을 지탱해 온 진짜 동력이었다.

이석현 저 <재난인문학>이라는 노작을 접하며 우리는 비로소 '재난인문학'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동안 재난학이 공학적·방재적·정책적 차원에 치우쳐 있었다면, 저자는 여기에 깊이 있는 역사적 사유와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불어넣음으로써 학문의 범주를 획기적으로 확장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는 기후 위기, 감염병의 대유행, 기술적 참사 등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 상시화된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점에 출간된 <재난인문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비극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지혜를 제공한다.

나 역시 역사연구소를 이끌어가는 소장으로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이석현 선생이 외롭게 일구어 놓은 이 새로운 학문적 터전이 일회성 결실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이 풍성한 씨앗이 되어, 앞으로 고통의 역사 속에서 인간성을 탐구하고, 재난을 통과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살피는 이 의미 있는 학문적 길 위에 수많은 후학이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염원한다.

학문의 숲은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지속적인 발걸음이 모여 형성되는 법이다. 이석현 선생이 쏘아 올린 '재난인문학'이라는 신호탄이 수많은 젊은 학자들과 연구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 더 넓고 푸른 학문의 숲으로 우거지기를 기대해 본다. 삼 주 전 나에게 전달된 이 한 권의 책은, 앞으로 우리 역사가 나가야 할 소중한 인문학적 이정표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빛나사역사연구소 소장 김준권박사

  • 도배방지 이미지

김준권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김준권 사찰탐방기】 빗소리에 젖어드는 산사, 다시 찾은 낙산사의 기억 / 김준권
[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153) 멕시코 현지 동포간담회에 참석한 대통령 이재명의 객설, 프랑스 혁명은 급하게 가다가 반동 맞이한 것 아니다 / 최자영
【김준권 칼럼】 뿜어 나오는 증기, 낯선 길 위의 서정(抒情) / 김준권
【김준권 서평】《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 상자》가 전하는 문명과 생태의 역대기 / 김준권
[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152) 중도실용 및 통합을 정책 아닌 인물 중심으로 이해한 대통령 이재명과 민주당의 치명적 오류 – 최민희(민주당 최고위원)의 ‘정신 통합론’에 부쳐 / 최자영
예술이 가격으로 평가받는 시대, 드라마 ‘포핸즈’가 던진 질문 / 김지윤
【김준권칼럼】 붉은 등불에 숨겨진 제국의 그림자...유곽(遊廓) / 김준권
[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151) 세상에 사법부가 따로 독립한 데 없고, 헌법재판소가 국회 위에 군림하는 데 없어 – 조희대의 대법관 후보 제청에 대한 청와대의 거부권 행사에 부쳐 / 최자영
[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149) 핵심은 찐명, 반명 등 개인 성향이 아니라 정당공천권에 줄 서는 제도의 문제 / 최자영
[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148) 조희대 탄핵 못 한 것이 당 대표 정청래 때문이라는 송영길, 조희대 탄핵하는 데 공감한 적 없다는 이재명의 청와대 / 최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