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는 민주당 제안의 특검법, 양곡법을 다수당 독재로 규정,
다수당 독재 막기 위해 내각제 하자고 하면서,
소수당 몽니 부림은 문제 삼지 않아
국민이 발안, 직접투표하는 곳에서는 한 개인의 목에 칼 들이대는 것이 무용지물
주간조선에, 여태 칩거하던 손학규의 대담(인터뷰)이 실렸다. “내각제로 7공화국 열자”란 표제하에 손학규는, “대통령제 신화에서 벗어나, 독일식 의원내각제로 개헌할 것을 촉구”, “여소야대가 되면 항상 나올 수 있는 것이 대통령 탄핵”, “한국같이 분파와 당쟁이 심한 나라에서는 대통령과 총리가 속한 정당이 다를 때 그 혼란은 말도 못 할 것”, “독일은 잘사는 나라고, 노인·어린이 천국인 복지국가”, “의회가 마구잡이로 횡포를 부리는 까닭은 권력만 있고 책임을 갖지 않기 때문” 등 발언을 했다.(주간조선, 2024.12.27.)
독일식 내각제를 주창하는 손학규의 이 같은 발언을 뒤집어보면, “대통령 탄핵은 대통령의 잘잘못 여부 때문이 아니라, 여소야대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혼란을 줄이려면, 대통령과 총리가 소속 정당이 같아야 한다”, “독일이 잘살고, 노인·어린이 천국인 복지국가가 된 것은 내각제 때문이다”가 된다.
손학규의 말을 빌리면, “국회나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도 크다. 어떻게 저런 놈들한테 나라를 맡기냐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이런 믿지 못할 국회를 두고 손학규는 어떻게 내각제를 하자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국회의 책임의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그 책임의식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논지를 전개한다.
첫째, 내각제를 통해 더 큰 권력을 국회에 주자고 한 것이다. 손학규에 따르면, 현재 국회는 책임을 지지 않는데, 거기다가 더 큰 권력을 주면 책임의식이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같은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지금 국회가 책임도 안 지고 권력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은 더 큰 권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이 된다.
둘째, 대통령(윤석열)의 거부권 행사를 옹호하고, 다수 야당(민주당)의 결정에 대해서는 권한만 누리고 책임을 안 지는 행위로 규정한다. 다수당이 입법독재, 연성독재(법치를 빙자하고 권력을 확장하여 전제정치로 가는 것)를 하므로 대통령이 그 독재에 맞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손학규는 주창한다. 그런데 손학규가 “책임을 안 진다(무책임)”, “연성독재” 등으로 평가한 다수당의 결정은 특검법, 탄핵, 양곡관리법 같은 것이다.
손학규의 이 같은 발언이 갖는 중차대한 오류는 세 가지이다. 첫째, 연성독재가 대통령(윤석열) 아닌 국회 다수당에게만 해당된다고 본 점이다. 손학규의 이 말은 대통령(윤석열)과 소수당(국힘당)은 연성독재를 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수당은 물론 대통령은, 이른바 법 테두리 안의 연성독재뿐 아니라, 대놓고 법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현재로서 법률과 헌법을 위반한 내란과 외환의 혐의를 지고 있는 상황이 그 증거가 될 수 있겠다. 더구나 손학규는 국회 다수당의 결정을 연성 독재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국민 다수의 뜻을 부정하는 독선을 범하고 있다.
둘째, 다수당에 의한 대통령 탄핵이 대통령의 잘못이 아니라 ‘여소야대’라는 힘의 논리에 있다고 본 점이다. “여소야대가 되면 항상 나올 수 있는 것이 대통령 탄핵이다”라는 손학규의 말은 검찰조직을 통해 윤석열이 자행한 편파적 수사, 이른바 ‘선택적 정의’나, 국무위원들의 의견도 제대로 듣지 않고 계엄을 선포하기에 급급했던 독선 같은 속알맹이들을 형해화시켜 버렸다.
셋째, 그가 한국의 정치 혼란이 사람 탓이 아니라 대통령과 총리가 서로 속한 정당이 달라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 점이다. “한국같이 분파와 당쟁이 심한 나라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속한 정당이 다를 때 그 혼란은 말도 못할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손학규는 한국에서는 왜 분파와 당쟁이 심할까에 대한 원인 규명을 생략하고 있다. 정당 간 분파와 당쟁으로 인한 혼란은 대통령과 총리가 서로 속한 정당만 다르지 않게 조치한다든가, 독일 내각제를 빌려온다고 해서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독일과 한국은 정치 권력 판도가 근원적으로 다르고, 독일 내각제가 한국의 풍토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손학규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독일 연방정부의 내각제는 지역 분권적 구조 위에 성립한 것으로서, 각 지역의 16개 주(란트)는 독립된 헌법, 입법, 행정, 사법 기구 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극단적 중앙집권의 구조하에 있으므로, 중앙의 국회 내부에서는 물론,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와 대통령 간에도 갈등이 치열하다. 분권이 전제되지 않는 내각제는 지금의 국회와 같이 분파와 당쟁이 여전히 심할 것이고 또한 살얼음판을 걷는 것같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손학규는 내각제가 만병통치약인 줄로 아는 것 같다. 잘 사는 나라 독일에서 내각제를 하니, 우리도 그 같은 것을 하자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 말은 마치 “내각제만 하면 한국도 잘살고 노인·어린이 천국인 복지국가가 된다”, 혹은 “한국은 여태 내각제가 아니어서 못살고 노인·어린이 천국이 되지 못한 것이다”란 말과 같은 것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독일의 노인·어린이 천국은 내각제라는 형식 때문이 아니라, 그 의회에서 논의되는 정책의 방향 때문이다. 정책 방향은 의회가 제도적, 형식적으로 갖는 상대적 권력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의원들 개개인의 가치관, 지향성에서 나온다. 독일에서 노인·어린이 등에 대한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것은 정책의 방향에서이지, 내각제라는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교육, 의료, 주거 등 세 가지는 다소간에 공공재로 충당한다. 원칙적으로 교육이 무료이며, 경상(經常) 치료의 경우 병원도 무료이다. 주거도 다소간 공공재이다. 부동산이 재테크(돈 불리기)에 이용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 부동산 보유세를 엄청나게 부과한다. 집을 보유하면 장래에 집값이 올라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납세 부담 때문에 손해를 보니, 차라리 세 들어 사는 것이다, 이런 제도는 공공재에 대한 사회적 양심,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지, 내각제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 국회를 살펴보자면, 예컨대, 국힘당이 윤석열 정부의 부자 감세에 동조하고, 또 민주당도 가상화폐 소득에 대한 과세 유예에 편승한다든가 하여 거대 양당이 유사한 노선을 걸을 수도 있다. 아니면, 국힘당에서는 노란봉투법에 반대하는데, 민주당에서는 재삼 추진하는 등, 야당이 서로 상반된 노선을 택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정책이나 노선의 차이는 내각제 실시 여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내각제 한다고 해서 국힘당이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부자 감세에 반대한다든지, 노란봉투법에 찬성한다든지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지향성의 차이는 국회가 다른 기관에 비해 가지는 상대적 권력의 크기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이고, 또 손학규가 말하는 ‘책임’ 의식과도 무관하다.
권력 구조 관련하여, 손학규는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회 권력과 행정부 권력이 하나로 되는 내각제 개헌을 해야 한다”, “지금 국힘당으로서는 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런 방안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세 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째, 국회와 행정부의 권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삼권분립의 구도를 없애자는 것, 둘째, 현재로서 국힘당은 다음 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내각제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면 집권 가능성도 있다는 것, 셋째, 국힘당이 집권 가능성이 희박한, 다급한 지금의 상황에서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설득’이라는 말의 속내가, 국민의 실제 의사와 무관하게, 즉 하의상달 방식으로서가 아니게,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의사를 거스르더라도, 억지로라도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를 뜻한다고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유일무이한 목적을 집권에 두는 위정자들의 이 같은 기획(시나리오)은 염치 불고는 물론 논리가 뒤죽박죽이다. 무엇보다 내각제를 해야하는 이유부터가 중구난방인 것이 그러하다. 한편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이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손학규처럼, 오히려 국회가 무책임하게 횡포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내각제뿐 아니라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담론에서도 논리가 일관성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전 민주당 의원 김두관 등은 ‘분권형 대통령제’란 표어 아래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에게로 분권하여 이양하고, 동시에 대통령은 5년 단임제에서 4년 중임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보았다. 단임으로는 뜻하는 바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학규는, “4년 중임제는 4년 포퓰리즘 + 4년 독재다. 합쳐서 8년 독재가 될 것이다. 4년 중임제는 나라 망치는 길이다. 5년 단임제보다 못하다”고 했다. 김종인(전 국힘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중임제가 단임제보다 더한 질곡을 가져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대통령 중임제에 반대하고 내각제를 지지하는 손학규는 중임제의 부작용을 두고, “다음의 선거를 위해 지역화폐니 청년소득 같은 포퓰리즘 공약만 남발할 것”이라고 했다. 지역화폐나 청년소득에 못마땅해 하는 손학규는 윤석열 같은 대통령이 또 나와서 부자 감세를 하는 것에는 아마도 반대하지 않을 것 같다.
손학규는 노인·어린이 천국인 독일의 복지가 내각제만 하면 공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이 호도했다. 사람이 도모해야 하는 일을 마치 제도가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사기를 쳤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를 내각제로 바꾼다고 해서, 부자 감세에 찬성하던 국힘당이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공공재 및 복지 정책 확대를 지지할 리는 만무하다.
사람은 탓하지 않고, 제도의 형식만 바꾸면 뭔가가 달라질 것처럼 호도하는 이들은 손학규만이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든가(여기서도 그 정당성을 독일에서 끌어댄다), 총리제를 해서 대통령 권한을 분리해서 총리에게도 넘겨야 한다든가, 대통령을 5년 단임에서 4년 중임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런 점에서 다 같은 맥락에 있다.
현재 위정자들이 졸속으로 제시하는 개헌 담론에는 공히 두 가지 커다란 오류가 있다. 첫째, 구체적 내용에서 의견이 상충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대통령이 잘못할 때, 그 탓을 사람에게가 아닌 제도에다 돌리는 것이다. 마치 5년 단임제이기 때문, 혹은 내각제가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 그러하다.
사람이 잘못하면, 사람을 벌하거나 쫓아내면 된다. 구태여 제도를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윤석열이 잘못했으면 윤석열을 벌하고 쫓아내면 된다. 거기에 반드시 개헌 담론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5년 단임제보다 4년 중임제가 좋은가 여부를 두고 서로 왈가왈부 다툴 필요가 없다.
둘째, 손학규는 양곡관리법, 지역화폐, 청년수당을 다수당의 독재, 혹은 ‘포퓰리즘’ 등으로 비난하지만, 국민 대중이 반드시 손학규와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국민 대중 중에는 오히려 명색이 반(反)포퓰리즘이라는 구실을 빌미로 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그리고 그 거부권에 동조하는 국회 내 소수당의 독재에 분노하는 이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일 수도 있는, 그 분노하는 이들은 손학규의 내각제 개헌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손학규의 내각제란 양곡관리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윤석열을 독재자로 보지 않고, 그 거부권에 편승하는 소수당의 동조를 몽니 부림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다수당의 결정을 ‘독재’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학규는 소수의 독재를 지향하는 것이 분명하다.
개인은 각기 가치관, 편견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그것은 타인이 간여할 수 없는, 부득이한 자유의 영역이다. 그래서 손학규도 양곡관리법에 반대하는 반(反)포퓰리즘 표방 대통령, 다수당의 발목을 잡고 몽니 부림하는 소수당을 개인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그 손학규가 국회가 마구잡이로 횡포 부리는 줄 알면서도, 그 국회에 대통령의 권력까지 빼앗아 더 보태 주면 책임감을 가질 것이므로 내각제 하자고 하든, 반대로 김두관이 대통령이 제왕적으로 독재하니, 그 권력을 분리하여 총리에게로 나누어주자고 하든, 제각기 의견, 편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 또 김두관이 4년 중임제가 좋다고 하거나, 반대로 손학규, 김종인 등이 대통령 중임제는 단임제보다 더한 질곡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 같이 상충하는 견해들도 자유로운 개인 판단의 영역이다. 각기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자유를 헌법이 보장한다.
그러나 영국 옥스포드에서 수학한 정치학 박사 손학규가 내각제를 주창한다고 해서, 국민 민중이 한 개인 위정자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 유학하지 않아도, 또 정치학 박사가 아니라도, 국민 민중도 스스로 판단하고, 발안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이며 다수결로 하며, 그 밖, 그 위에 어떤 정통성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 민중이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판단했다고 깨닫는 순간, 취소하고 되돌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윤석열을 잘못 뽑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발안하여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국민 민중이 '온'이 아니라 '반'쪼가리인 이유가 그러하다. 윤석열을 뽑는 것도, 쫓아내는 것도 죄다 법치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의 영역이다. 윤석열 자신이 아무리 ‘자유’를 수호하려 한 것이라 떠들어대도, 그 개인의 발언, 행위, 믿음에 대한 궁극적 가치 판단은 국민 민중이 다수결로 해야 한다.
위정자들이 제각기 뛰쳐나와 내각제, 총리제를 떠들어대는 것도, 국민 민중의 뜻과 무관하게, 여태 정치제도를 위정자들의 짬짜미로 좌지우지해 해 왔던 제도적 흠결을 노정한다. 이재명만 없어지면, 혹여 지네들끼리 짬짬미 해서 내각제를 할 수도 있다는 전망에서, 그이를 없애려고 몸부림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국민 민중은 허깨비로만 존재한다.
급기야 권력에 혈안이 된 위정자들이 경쟁자의 목에 바로 칼을 대기도 하고, 증거 조작하여 사법 살인하려 하기도 하고, 이른바 ‘사법 리스크’ 있는 이는 다음 대선에 빠져달라고 언론을 통해 종용하기도 한다. 혹여 윤석열이 탄핵되어 조기 대선이라도 치를 판이 되면, 이 같은 언론 선동은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그런데 개인은 칼로 찌르거나, 사법 살인 하거나, 인격을 모함하거나 하면 스러지거나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집합으로서의 국민 민중에게는 그런 꼼수가 먹히지 않는다. 또 국민의 직접 투표는 ‘명태균 게이트’에서 보듯, 조작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여론조사와도 다르다. 개표과정에서 전산 조작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이래저래 국민 민중의 발안과 직접투표는 갖가지 꼼수에 대한 예방 효과를 갖는다. 국민 민중이 스스로 발안하고 최종의 결정권을 가진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이재명같이 수난을 겪는 개인이 애초에 없어질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