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 정부에 그 국민(시민)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민주당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니다
대구, 경북의 국힘당(‘내란당’) 선택은 자유 의지
국힘당 찍는 것은 반드시 내란 지지하는 것 아니고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는 집권의 구조적 병폐 노정
집권의 중앙정당 공천제 폐기하고 분권의 지역정당 합법화해야
6.3 선거로 들어선 새 정부가 ‘통합과 실용’을 내걸었다. 먼저 ‘통합’은 전 대통령 윤석열이 좋아하던 것인데, 새 대통령 이재명이 물려받았다. 윤석열이 박정희를 좋아한다는데, 이재명도 대구에 갔을 때, 박정희를 치켜세우고, 그 경제발전의 공을 치하했다. 그가 이룬 경제발전의 모델은 이재명이 강조하는 이른바 ‘먹사니즘’, ‘잘사니즘’의 민생경제와 통하는 데가 있다.
이재명은, 한편에 늘 “정치는 위정자가 하는 것 같지만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하고, 다른 편에 “통합”을 내결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서로 상충하는 데가 있다. 전자, ‘국민이 하는 것’은 반드시 ‘통합’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보궐 대선에서 대구, 경북의 민주당 득표는 20%대에 머물렀다. 민주당이 내란당으로 지목하는 국힘당 지지가 대구, 경북에서 거의 70%에 근접했다. 이재명이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구, 경북 인의 이 같은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여기에 통합은 불가능하다. 통합 대신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 새 정부가 말하는 통합은 윤석열의 막가파식 통합이 아니라 중도(혹은 중도보수)를 말하는 것 같다. 이쪽저쪽으로 다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버무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겠다는 것. 여기서 문제는 중도(보수)는 통합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극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 중도(보수)가 입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실용’은 ‘통합’과 무관한 개념이고, 반드시 (민생)‘경제’에만 관련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실용’ 자체가 이재명이 추구하는 ‘다수’의 ‘먹사니즘’, ‘잘사니즘’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실용을 경제와 연관시킨다 하더라도, 그 경제의 실용은 기업, 노동자, 각종 서민 등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기업 위주의 경제도 실용이고, 서민을 위한 경제도 실용이다.
여기서도 새 정부가 말하는 ‘실용’은 윤석열식 부자 감세나 기업 편향적 경제정책이 아니라, 서민도 함께 아우르는 중도의 경제정책을 시행하겠다는 뜻으로 풀 수 있겠다. 그러니, ‘통합’과 마찬가지로, 그냥 ‘실용’이라고 하면 안 된다. ‘통합’과 ‘실용’은 공히 중도(보수)의 경제정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 수 있겠고, 이것이 다수의 ‘먹사니즘’으로 연결되는 것이겠다.
중도(보수)를 두고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전자는 극단의 양끝을 인정하는 점에서 민주적이지만, 후자의 ‘통합’은 획일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독선, 독재 지향성을 깔고 있다. 새 정부는 내란과 분열을 종식하고 ‘통합’을 추구한다고 했으나, 내란을 종식하는 것이 반드시 ‘통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한 예로, 대구, 경북 인의 국힘당 지지가 70%를 상회하는 것은 다양성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 통합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대구, 경북 인의 국힘당 지지가 비로 ‘내란’을 선호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것이고, 윤석열 없는 국힘당 지지는 민주당 찍기 싫은 이에게 불가피한 선택지가 된다. 국힘당 지지는 내란 지지가 아니다. 병폐가 있다면, 그것은, 주로 두 가지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는 중앙집권적 정당구조에 있다.
새 정부가 내건 ‘통합’의 구호는 중앙집권적 구조 및 그 폐해와 맞물려 있다. 최근 국힘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으로 적을 옮긴 김상욱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민주당 내의 충성경쟁, 소신껏 말하지 못하는 폐쇄성이 국힘당과 다소간에 다르지 않다. 그래서 민주당 내에서도 쓴소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당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 등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집권적 정당공천권이 존재하는 한, 국회의원의 충성경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의사의 자유로운 개진은 불가능하다. 김상욱이 아무리 국민의 뜻을 따르라고 쓴소리를 해도, 그것은 헛소리가 된다. 개인적인 결심이나 선의(善意)의 차원이 아니라, 권력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차기 공천을 다시 받고 싶은 이가 어떻게 지도부에 충성을 경쟁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의사를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나? 필자가 알기로, 수년 전 정당공천권 없애야 된다고 한 전라도 한 국회의원은 차기 공천을 받지 못하고 탈락했고, 조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
국회의원만 공천하는 것이 아니라, 저 말단의 지자체장은 물론 시, 구 의원까지 중앙정당에서 공천한다. 지자체의 장, 의원의 공천권은 대개 그 지역구 국회의원이 행사한다. 그래서 공천받고 싶은 이들은 국회의원이 떴다 하면, 사족을 못 쓰고 충성경쟁을 하게 되고, 거기에 지역민은 눈 밖의 존재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의원들에게 국민의 뜻을 따르라고 민주당 안에서 쓴소리 하겠다는 김상옥의 의지는 실현불가능한 꿈을 좇는 것이다. 정당공천권을 그대로 두는 한, 의원들의 눈에는, 국민이 아니라, 공천권 가진 이에 대한 충성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윤석열과 이재명이 이룰 수 없는 ‘통합’을 구호로 내걸고 떠드는 헛소리와 같다. 이들이 ‘국민의 뜻’, ‘통합’ 등은 비현실적인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중앙집권적 국회의 운영은 그 독재 지향성이, 윤석열의 독재 지향과 맥을 같이 한다. 민주당이나 국힘당이나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국민, 시민의 수준이다. 학생의 수준이 선생의 수준을 결정짓고, 국민(시민)의 수준이 위정자의 수준을 결정짓는다. 시민이 이 같은 독재 지향성의 정부 체제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에, 그 같은 정부가 수정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구 수가 만만치 않은 대구, 경북에서 민주당은 20%대 득표에 머물렀다. 그랬더니 사회소통망(SNS)에서 비난이 쇄도하는데, 그 가운데, ”그래 놓고 (중앙 정부에서) 돈은 달라고 한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시민의 이런 사고방식과 대구, 경북에 대한 비난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마무시한 함정을 지닌 것이다. 여당 정부를 지지하지 않으면, 당연히 누려야 할 정부의 재정 편성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나?
대구, 경북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자유의 영역이다. 한 가지 잣대를 들이대고, 통합을 요구하고, 대구, 경북이 국힘당 아닌 민주당 찍어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독재이다. 통합을 요구하는 윤석열, 이재명, 시민이 3박자로 다소간에 나란히 한통속이다.
차제에, 중앙에서 돈을 받아 쓸 필요가 없도록, 예산편성권을 중앙에서 각 지역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중앙이 아니라 지역이 주가 되어 예산을 짠다. 그래서 지역이 어떤 선택을 하든 중앙에 돈 달라고 손 벌릴 필요가 없게 된다.
‘변하지 않는 대구, 경북’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국회’를 매도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국회’가 있는 한, 대구, 경북도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 국회는 정당공천권을 내려 놓아야 하고, 지역정당을 중앙의 전국 정당과 같은 비중으로 합법화해야 한다.
다만, 중앙, 지역정당을 막론하고, 공천은 특정인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선을 통해 복수를 추천하고, 그 순서 정하는 것을 지역민, 혹은 국민에게 맡기는 것이다. 독일의 개방형 비례명부처럼, 정당에서 인사 검증을 하여 후보를 제시하되, 최종 결정권을 민중에게 개방함으로써, 정당 내의 비민주적 결정구조를 타파하고, 지나친 충성경쟁을 방지할 수 있겠다. 후보 군(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야합 혹은 암묵적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지원자 가운데서 적어도 5배수 이상의 후보 군을 추천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